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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세프의 편하고 맛있는 음식 2017-08-28

여성중앙 | 추천 0 | 조회 699

뉴욕 셰프의 편하고 맛있는 음식

미국 뉴욕 ABC키친의 헤드 셰프였던 에릭정이 서울 가로수길에 레스토랑을 열었다.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스타 셰프 장 조지, 오바마의 단골 식당 등의 수식어를 가진 ABC키친 출신이라니, 기대가 부풀었다. 그러나 그는 한참 동안 흔하디흔한 카르보나라 파스타 이야기를 했다. 편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겠다는 철학, 서울의 테이블원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주방은 긴장이 감도는 전쟁터 같지만 에릭정 셰프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임한다.
주방은 긴장이 감도는 전쟁터 같지만 에릭정 셰프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임한다.

주방은 긴장이 감도는 전쟁터 같지만 에릭정 셰프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임한다.
계단 입구에는 대나무가 사각거리고, 빈티지한 가구와 패턴 타일, 초록 화분이 곳곳에 놓인 넓은 테이블원(Table.1)은 한순간에 더위가 가실 만큼 시원했다. 그래도 가장 궁금한 것은 음식이었다. 추천 메뉴를 묻자 에릭정 셰프는 카르보나라 파스타를 이야기했다.

카르보나라 파스타를 제대로 하는 곳이 드물다지만,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출신의 셰프가 서울 시내 어느 이탤리언 식당에 불쑥 들어가도 맛볼 수 있는 카르보나라를 꼽다니 의외였다.

“크림소스에 달걀노른자를 넣는데 시간과 온도에 따라 걸쭉한 정도가 달라집니다. 무거운 크림에 달걀노른자, 판체타(이탤리언 베이컨)를 넣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무겁습니다. 그래서 가니시로 민트를 올려요. 후추도 마지막에 뿌립니다.”

에릭정 셰프의 관심 재료인 소금. 지역, 가공법에 따라 다른 다양한 소금을 경험하고 음식에 응용한다.
에릭정 셰프의 관심 재료인 소금. 지역, 가공법에 따라 다른 다양한 소금을 경험하고 음식에 응용한다.

에릭정 셰프의 관심 재료인 소금. 지역, 가공법에 따라 다른 다양한 소금을 경험하고 음식에 응용한다.
베이컨 기름을 빼서 그 기름에 마늘과 양파를 볶아 양파의 단맛과 마늘의 고소한 맛을 빼낸 후 거기에 크림을 올리고 달걀노른자를 넣어 걸쭉함을 조절한다. 달걀노른자를 넣으면 크림만의 걸쭉함과는 조금 다른 농도가 된다. 크림만 넣으면 입에 감기는 느낌인데, 달걀노른자를 추가하면 담백하고 고소하면서 다소 가벼워진다.

마지막에 민트와 후추를 토핑한다. 후추는 흔히 매운맛만 더해준다고 생각하지만 특유의 향과 식감이 있다. 식재료의 맛이 음식과 어떻게 어울릴까를 단계별로 고민하는데, 후추를 소스에 섞어 맛이 뒤로 밀려나게 하기보다 토핑으로 뿌려 앞에서 도드라졌다가 뒤에 크림의 고소한 맛이 남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테이블원을 위해 개발한 레시피다. 그의 이런 설명은 음식을 맛본 후 적나라하게 다가왔다. 이 설명을 듣지 않고 카르보나라를 먹었던 일행도 민트의 상쾌함을, 후추의 개운함을 칭찬했다.

차돌박이미소크림파스타. 풍미를 더하고 뒷맛을 개운하게 하기 위해 토치로 불 맛을 낸다.
차돌박이미소크림파스타. 풍미를 더하고 뒷맛을 개운하게 하기 위해 토치로 불 맛을 낸다.

차돌박이미소크림파스타. 풍미를 더하고 뒷맛을 개운하게 하기 위해 토치로 불 맛을 낸다.
원재료의 맛

시금치 롱 브레드, 당근 샐러드, 미소된장 파스타로 메뉴 소개가 이어졌다. 제철과 지역성을 고려하며 메뉴를 짰다. 에릭정 역시 여느 셰프들처럼 식재료를 중시한다. 신선한 식재료가 기본이자 핵심이라는 의견은 같지만 좋은 재료로 자연스러운 한 접시, 일상의 요리를 만들고 싶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현란한 분자 요리나 예술 작품 같은 섬세하고 세련된 플레이팅보다 원재료의 맛과 색, 모양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파인다이닝 식당에서 일하면서, 손이 많이 가서 비싸 보인다는 느낌이 들긴 하는데 식자재 고유의 느낌과 맛이 사라진 음식이 과연 좋은가 하는 고민을 했다.

한 번의 특별한 경험보다 아무 때나 부담 없이 찾아와 편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일상의 음식에 가치를 둔다. “그냥 먹어도 맛있는 당근을 굳이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 당근스럽지 않게, 본래 분위기를 없앨 필요가 있을까요?” 당근이 맛있다는 말에는 그다지 동의할 수 없지만, 그가 추구하는 바는 알 것 같았다.

말린 청양고추와 굵은소금을 갈아 스테이크에 뿌려 낸다.
말린 청양고추와 굵은소금을 갈아 스테이크에 뿌려 낸다.

말린 청양고추와 굵은소금을 갈아 스테이크에 뿌려 낸다.
그가 처음부터 편한 음식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거쳐 트라이베카의 이탤리언 레스토랑 Locanda Verde에서 일했는데, 그곳에서 정통 이탤리언 파스타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다. 1년이 안 되어 부주방장 자리에 올랐고, 파스타 반죽, 라비올리 속에 들어가는 소, 각종 소스 등을 배우면서 단순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의 가치를 깨달았다.

“뉴욕에는 동네 식당부터 최고급 식당까지 다양한 수준의 이탤리언 음식점이 있어요. 봉지 파스타를 7분 삶아서 시판 소스를 섞을 수도 있지만, 달걀과 향료를 넣어 민 반죽에 하루 숙성한 소스로 파스타를 만드는 방법도 있습니다. 또 이탤리언 레시피는 할머니 시절부터 내려온 정통 레시피 중에도 많아요. 그런 다양성이 매력적이었고, 배울 것이 많았어요.”

자연히 파스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테이블원의 파스타 메뉴가 다채로운 이유도 이런 그의 이력 때문이다. 서울에 자리한 식당이므로 제철 재료와 더불어 지역성을 살려 차돌박이미소크림파스타나 소이크림파스타, 명란파스타 등의 메뉴를 개발했다.

그가 굳이 생면을 만들어 쓰는 이유는 파스타에 식감과 맛을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생면의 매력은 입에 넣었을 때 이에 닿으며 끊기는 느낌에 있다. 건면은 똑똑 끊어지지만 생면은 부드럽고 미끈하게 끊긴다.

기름에 살짝 튀겨 오븐에 구운 참나물은 라이스 볼에 올려 내는 용도.
기름에 살짝 튀겨 오븐에 구운 참나물은 라이스 볼에 올려 내는 용도.

기름에 살짝 튀겨 오븐에 구운 참나물은 라이스 볼에 올려 내는 용도.
이후 에릭정은 ABC키친으로 갔다. 그곳의 스타 셰프 장 조지와 일하면서 각각의 식재료가 가진 고유의 맛에 대해 배웠다. 그동안 거쳐 온 모든 여정이 여기 오기 위한 단계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깨달은 바가 많았다.

다양한 조리 방법, 현란한 기계가 있어도 정말 좋은 식자재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농부들을 직접 만나면서 그들이 고생하고 공을 들여 생산해낸 식자재의 값어치에 눈을 떴다.

달군 후 생선이나 기타 음식을 올려 내는 솔트플레이트는 프랑스 요리에서 쓰는 재료다. 씻어 말려 여러 번 쓸 수 있다.
달군 후 생선이나 기타 음식을 올려 내는 솔트플레이트는 프랑스 요리에서 쓰는 재료다. 씻어 말려 여러 번 쓸 수 있다.

달군 후 생선이나 기타 음식을 올려 내는 솔트플레이트는 프랑스 요리에서 쓰는 재료다. 씻어 말려 여러 번 쓸 수 있다.
두 번째 직업

본래 직업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3년 남짓 프로그래머로 일하다가 부모님께 의존하지 않으려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데 우연히 식당 일을 하며 마음이 확 바뀌었다.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더 하려던 본래 계획을 미련 없이 접었다.

8시간씩 책상에 앉아 씨름하던 3년을 통틀어 그날 하루만큼 기쁜 날이 없었다. 그동안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무언가를 마무리한 완결감이 대단했고, 정말 일을 열심히 했다는 느낌이 황홀했다. 그때가 스물여섯 살, 그는 주변과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확신에 차서 전업했다.

설거지로 시작해서 처음 2년 동안은 양파와 마늘을 까며 주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만 봤다. 손으로 하는 일, 어떤 재료를 가지고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변화를 만들어가는 경험, 그리고 접시 위에 하나의 음식을 완성하는 순간이 행복해서 12시간, 14시간의 노동이 하나도 버겁지 않았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플레이팅을 위해 사용하는 스패출러.
자연스러운 플레이팅을 위해 사용하는 스패출러.

자연스러운 플레이팅을 위해 사용하는 스패출러.
소금과 식초

재료 본연의 맛을 중시하는 그는 소금과 식초 등의 양념을 섬세하게 쓴다. 소금과 식초는 침샘을 열어 다음에 들어오는 맛을 배가시킨다. 재료의 맛을 진하게 느끼게 하는 부스터 역할을 하는 것.

당근 샐러드를 만들 때 당근을 식초, 소금, 마늘, 타임에 마리네이드해 오븐에 한 번 굽는다. 이렇게 조리한 당근을 먹어보면 시큼하고 짠맛이 나면서 마늘의 톡 쏘는 매운맛을 느낀 후 당근의 달큼하고 땅에서 나온 맛을 느낄 수 있다. 케일 샐러드에도 식초를 넣는다. 식초의 강한 첫맛이 침샘을 열어 케일 향을 그윽하게 남긴다.

그의 음식에는 이렇게 맛의 층위를 어떤 순서로 느끼게 할지에 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소금에 대한 탐구도 열심이다. 영국 말돈(Maldon)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인 말돈은 짠맛이 덜하고 고소하며, 용암이 들어간 하와이안 솔트는 아삭거리면서 뒷맛이 깨끗하고, 한국에 와서 맛본 함초 소금은 향이 매력적이라고 품평한다.

최근에 맛본 간장 항아리에 생긴 소금은 향이 독특하고 감칠맛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언젠가 간장이 들어가는 요리에 응용해볼 생각이다. 굵은소금은 오래 끓이는 요리에 쓰고 입자가 곱거나 염도가 낮은 소금은 가니시로 쓴다. 테이블원 채끝 스테이크에는 말린 청양고추와 굵은소금을 갈아 만든 매콤한 소금을 뿌려 낸다.

새우바질브루스게타는 와인과도 잘 어울리는 스타터 메뉴다.
새우바질브루스게타는 와인과도 잘 어울리는 스타터 메뉴다.

새우바질브루스게타는 와인과도 잘 어울리는 스타터 메뉴다.
그의 셰프복 주머니에는 파티시에가 아이싱 할 때 쓰는 스패출러가 항상 꽂혀 있다. 플레이팅을 할 때 핀셋을 쓰는 경우는 종종 보았지만 스패출러라니 특이하다. 그는 음식뿐 아니라 접시의 담음새도 편안한 것이 좋아 다소 투박하게 매만져지는 도구를 10년 넘게 쓰고 있다고 한다.

ABC키친 인기 메뉴인 당근샐러드.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사워크림을 올렸다.
ABC키친 인기 메뉴인 당근샐러드.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사워크림을 올렸다.

ABC키친 인기 메뉴인 당근샐러드.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사워크림을 올렸다.
“테이블원이 누구든지 편하게 와서 1시간이고 3시간이고 머물다 갈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무거운 음식도 거의 없어요. 메인 하나에 여러 가지 사이드 디시를 즐겨도 괜찮아요. 홀 분위기도, 직원들 옷차림도, 손님을 대하는 태도도 캐주얼하거든요.”

뭔가 격식 있고 으리으리할 것 같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출신의 셰프는 새 레스토랑을 이렇게 소개했다. 테이블원에 들러 롱 브레드에 당근 샐러드를 주문하고 여름날을 느긋하게 보내보기를. 이제까지 몰랐던 당근의 맛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에디터_이나래 | 사진_윤상명
여성중앙 2017.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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