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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맛 2018-01-12

여성중앙 | 추천 1 | 조회 428

마켓 레이지 헤븐의 안리안·유상진 대표를 만난 것은 3년 전쯤의 일이다. SNS에 올라온 사진 한 장과 영상 하나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전라도 고창, 청보리밭 사잇길에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풍경이 있었다. 기다란 테이블 위에는 갖가지 음식이 차려져 있고, 그 위쪽에는 하얀 천이 드리워져 그늘을 만들었고, 테이블 옆에는 재즈 공연이 한창이고, 한쪽에서는 고구마, 감자, 당근 같은 농작물을 팔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진행한 사람이 바로 마켓 레이지 헤븐의 안리안·유상진 대표였다.

자연 재배 포도로 직접 담근 포도주를 처음 개봉했다. 

마켓 레이지 헤븐이라는 브랜드를 내건 2016년 이후, 약 일 년간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에 한 번씩은 이런 이벤트를 진행했다. 안리안 대표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런 행사를 기획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저는 고창에서 자랐고, 남편(유상진)은 경남 통영 사람이에요. 둘 다 ‘먹고 사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무엇을 어떻게 누구와 먹을 것이냐’는 생활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행위지만, 바삐 생활하다 보면 지키기 어렵죠.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파머스 테이블’과 ‘파머스 마켓’을 기획한 거였어요.”

비닐하우스 안은 난로와 음식의 열기로 온기가 가득했다.

2016년 연말에는 비닐하우스 안을 카페처럼 꾸며 사람들을 초대했다. 일명 ‘파머스 카페’. 예전에 간혹 비닐하우스에서 삼삼오오 모여 먹고 놀던 것에 착안하여 기획한 것이다. 파머스 카페 오픈 몇 시간 전에 SNS를 통해 초대 글을 올렸는데 전라남도, 충청도 지역 사람들까지 와서 즐겼다. 그 덕에 ‘고창의 먹거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졌고, 고창에 사는 농민들도 마켓 레이지 헤븐에 대해 긍정적 시선을 비추기 시작했다. 

비닐하우스 옆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마켓 레이지 헤븐의 유상진 대표.

그 이후 이들은 본격적으로 ‘좋은 먹거리’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하자면, 농장과 소비자를 연결하는 유통 브랜드인 셈이다. 농작물의 브랜딩이나 패키지 등에 중점을 두는 브랜드와 달리 이들은 직접 농장을 방문하는 것은 기본, 일손이 부족하면 농사일을 돕고, 직접 재배해보고, 먹어본 것들만 판매한다. 패키지는 투박하다. 스티로폼이나 종이 상자에 ‘마켓 레이지 헤븐’ 로고가 그려진 스티커 하나 붙인 게 다다. 처음으로 판매한 제품은 ‘들깨 가래떡’이었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품절 대란을 뚫어야만 살 수 있는 떡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들깨 가래떡을 시작한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농부가 바지런히 농사지은 건강한 쌀을 알리고 싶었던 것. 우연히 맛 좋은 들깨를 먹다가, 이걸 떡으로 만들면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시도 끝에 들깨 가래떡이 탄생했다. “먹고 사는 일이 굉장히 단순하고, 생활 그 자체라 별것 아닌 것 같죠. 이렇게 매우 소소한 일상을 특별한 일상으로 바꿔주는 매개체를 소개하는 일을 누군가는 꼭 해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야 삶이 더 풍요로워질 것이라 생각했어요.” 

마켓 레이지 헤븐 사무실 선반에는 감자와 호박, 종류별로 나눠 담은 콩이 가득하다.

집을 사무실 삼아 일하던 이들은 지난 6월, 고창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작고 오래된 건물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작은 책상과 기다란 테이블을 들이고, 주방을 꾸몄다. 주방과 테이블이 놓인 공간은 사무실의 반이 넘는다. 책장에는 책보다 양파와 고구마, 콩을 종류별로 담은 통, 직접 만든 잼 같은 것들이 더 많았고, 창가에는 감 열 알이 예쁘게 마르고 있었으며, 난로 위 주물 팬에는 들깨 가래떡과 고구마, 감자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구워지고 있었다.

일하는 공간인 동시에 친구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아지트이기도 한 마켓 레이지 헤븐의 사무실.

일하는 공간이라기보다 생활하는 공간에 더 가까워 보였다. 사실 이들이 하는 일이 생활이고, 생활이 곧 일이다. 농작물 판매·유통하는 일을 하니 자연스레 농사일에 관심이 많아졌다. 특히 요즘은 자연 재배 공부에 열심이다. “정말 신기한 일을 경험했어요. 저 주방에 있는 수박 보이세요 저게 지난여름에 딴 자연 재배 수박이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 썩지도 않고, 그냥 수분만 천천히 빠지는 중이에요. 저희 사무실 안에 있는 것들이 모두 자연 재배 농작물인데, 이렇게 몇 달을 두어도 썩지를 않아요.” 

통영산 석화는 알이 크고 비린내 없이 깔끔한 맛이 일품이다. 

자연 재배는 농약이나 비료는 물론, 유기농에서 쓰는 유기 비료조차 전혀 쓰지 않는 농업을 말한다. 자연 그대로의 환경 속에서 인간이 작물을 심고 가꾸는 것이다. 화학 비료든 유기 비료든 비료 자체가 병충해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자연 그대로 내버려두자는 것이 자연 재배의 기본 원칙이다. 자연 재배로 기른 채소나 과일은 크기가 작아도 속이 꽉 차 묵직하다.

마켓 레이지 헤븐 사무실의 외관. 

“자연 재배로 키운 쌈 채소는 맛도 달라요. 쓴맛이나 짠맛이 많이 나는 편이에요. 토마토도 정말 맛있어요. 얼마 전에는 토마토를 가지고 효소를 담갔는데, 설탕도 넣지 않고 토마토만으로 만들었거든요. 손으로 으깨서 병에 담아 15일 정도 발효시키면 토마토 건더기 위로 하얀 곰팡이가 피는데, 그 곰팡이를 걷어내고 삼베 천에 내리면 돼요. 와인도 발효종 없이 포도만 넣고 발효시켜 담갔고요.” 

마켓 레이지 헤븐을 이끄는 유상진, 안리안, 김승지, 황주영씨가 모두 모여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도 비닐하우스 안 테이블에 한 상 가득 차려졌다. 연말 마무리 겸 새해맞이를 위한 자리다. 통영에서 가져온 석화와 자연 재배 쌀로 만든 떡과 생김을 넣어 맛을 낸 떡국, 고창에서 나는 바지락과 새우, 숯불로 구운 들깨 가래떡과 고구마, 감자, 귤, 자연 재배 포도로 직접 담근 포도주까지. 가장 토속적인 재료로 이국적인 풍경이 연출됐다. 

고창에서 양식한 바지락과 새우, 옥수수로 만든 해물찜.

“오늘 만든 요리는 모두 저희가 판매를 하거나 판매할 생각이 있는 재료를 사용했어요. 특히 요즘에는 해산물에 관심이 많은데, 그중 ‘지주식 생김’을 사람들에게 소개해볼까 해요. 물론 짧은 기간에 소량만 판매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 경험을 함께하면 좋으니까요.” 

안리안 대표와 황주영씨가 떡국을 만들고 있다.

김 양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바다가 얕고 밀물과 썰물의 차가 큰 지역에서는 지주식을, 조수 간만의 차가 적은 지역에서는 부유식을 한다. 지주식이란 바다의 바닥에 지주(기둥)를 박고 그 지주가 김발을 붙들게 한 상태에서 김을 키우는 방법이다. 지주식은 간조 때 김발이 물 밖으로 노출되어 햇볕과 바람을 맞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 가까운 조건이 형성되어 특히 맛이 좋다. 

방울토마토 마리네이드, 해물찜, 석화, 자연 재배 채소구이를 차려놓은 모습.

게다가 말리지 않은 생김은 김을 양식하는 사람이나 그 지역 사람들만 먹을 수 있는 별미다. 평범하지만 좋은 식재료를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 이런 노력에서 나온다. 2018년부터는 농사도 직접 짓고, 집고 짓고, 클래스도 기획·운영할 생각이다. 

없어서 못 판다는 마켓 레이지 헤븐의 베스트셀러 들깨 가래떡.

“사실 우리가 농사일을 시작으로, 많은 일을 하려고 하는 이유는 자급자족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기 위해서예요. 새해에는 서울에서 친구 3명이 고창으로 내려와 살 거예요. 뜻이 맞는 친구들이 한 지역에 살면서 그 지역에서 나는 작물과 내가 키운 작물로 밥을 먹고,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는 환경도 만들고, 이런 삶을 상상하고 있거든요.” 

자연 재배 쌀로 만든 떡, 생김, 굴을 넣어 만든 떡국.

마켓 레이지 헤븐의 안리안·유상진 대표가 하는 모든 일은 한때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다. 보다 나은 삶으로 향하는 과정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추운 겨울, 수고스러울지라도 맛있게 먹고, 특별하게 즐기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들 생활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제철에 먹는 식재료로 만든 요리는 별다른 양념을 하지 않아도 맛이 좋다.

Editor:김은정

Photographer:맹민화

출처:여성중앙 2018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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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자급자족을 목표로 이곳에 터를 잡은 마켓 레이지 헤븐의 겨울은 남다르다. 조금 수고스러워도 찬 바람 부는 계절을 만끽하는 그들의 겨울에는 사람 사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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